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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바타케 지카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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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남북조 시대에 걸쳐 활약한 일본의 공가이자 무장이다. 그는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으로서 겐무 신정에 참여했으며, 남북조 시대에는 남조의 핵심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그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북조에 강한 혐오감을 드러냈으며, 닛타 요시사다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지카후사는 역사서 《신황정통기》와 관직 해설서 《직원초》를 저술하여 남조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천황 중심의 사상을 펼쳤다. 그는 유능한 전투 지휘관이기도 했으며, 1354년 사망할 때까지 고무라카미 천황을 보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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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바타케 지카후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일본 화가 기쿠치 요사이 그림
본명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출생1293년 3월 8일
사망1354년 6월 1일
사망 장소요시노군, 나라현, 아시카가 막부
직업작가, 고문
국적일본
종교불교 (추정)
가족기타바타케 아키이에 (아들)
기타바타케 아키노부 (아들)
기타바타케 아키요시 (아들)
가계
씨족무라카미 겐지, 주나곤 가문, 기타바타케 가문
아버지기타바타케 모로시게
어머니후지와라노 다카시게의 딸
양아버지기타바타케 모로치카 (친할아버지)
배우자정보 없음
자녀기타바타케 아키이에
기타바타케 아키노부
기타바타케 아키요시
딸 (고무라카미 천황의 여고)
딸 (모리요시 친왕의 부인)
딸 (레이제이 모치사다의 부인)
관직
관위정2위 대납언
겐지 장자
입도 종1위 준대신, 준후 (남조)
정1위 (메이지 41년)
주군후시미 천황
고후시미 천황
고니조 천황
하나조노 천황
고다이고 천황
고무라카미 천황
작품
장르일본 역사
언어일본어
저서신황정통기
기타 정보
법명소겐(宗玄), 가쿠쿠(覚空)
묘소나라현 고조시 니시요시노초 아노의 화장원 터
나라현 우다시 무로의 무로지 등

2. 생애

기타바타케 가(北畠家)는 무라카미 겐지 유파를 잇는 명문으로, 지카후사는 쇼오(正応) 6년(1293년) 6월 24일 생후 반년 만에 관작에 서임되었다. 도쿠지(徳治) 2년(1307년) 레이제이 요리타카(冷泉頼隆)가 변관이 된 것에 격분하여 좌소변(左少弁) 직을 사임했다는 기록이 있다(《공경보임》). 엔쿄(延慶) 원년(1308년) 산기(参議)가 아닌 채로 종3위(従三位)에 올라 구교 지위에 올랐고, 엔쿄 3년(1310년) 산기가 된 후 오초(応長) 원년(1311년)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 겸 검비위사별당(検非違使別当), 그 해 12월 곤노주나곤(権中納言)으로 승진했다.

가메야마 천황의 뒤를 이을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던 쓰네아키라 친왕은 즉위하지 못했다. 고다이고 천황 즉위 후, 지카후사는 요시다 사다후사(吉田定房), 마데노코지 노부후사(万里小路宣房)와 함께 '고산보'(後三房)로 불리며 천황의 신임을 받았다.[13] 겐오(元応) 2년(1320년) 준나인 별당(淳和院別当), 겐코(元亨) 3년(1323년) 곤노다이나곤(権大納言)을 거쳐 쇼추(正中) 2년(1325년) 겐지노초자(源氏長者)가 되었다. 겐토쿠(元徳) 2년(1330년) 아들 요요시 친왕(世良親王)의 죽음을 계기로 출가하여 정계에서 은퇴했다. (법명: 소겐(宗玄))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 겐무 신정이 시작되자 정계에 복귀했으나, 모리요시 친왕(모리나가 친왕) 파였기에 고다이고 천황과 대립, 무쓰(오슈)로 파견된 아키이에를 따라 노리요시 친왕을 받들고 다가 성으로 갔다.

겐무(建武) 2년(1335년) 나카센다이의 난 진압 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겐무 정권에서 이탈, 1336년(겐무 3년) 교토를 점령하자, 지카후사는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과 함께 다카우지를 축출했다. 그러나 다카우지는 규슈에서 세력을 키워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승리하고 다시 교토를 점령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피신하여 남조를 세웠고, 지카후사는 남조에 합류, 다카우지가 옹립한 고묘 천황북조에 대항했다.

엔겐(延元) 3년/랴쿠오(暦応) 원년(1338년) 아들 아키이에와 닛타 요시사다가 전사하자, 남조 총사령관이 된 지카후사는 이세국에서 와타라이 이에유키의 협력을 얻어 세력 확대를 도모하며, 신국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이후 간토 지방에서 세력 확장을 위해 유키 무네히로와 함께 노리요시 친왕, 무네요시 친왕을 받들고 히타치국으로 건너갔다. 오다 하루히사, 세키 무네스케 등의 도움을 받아 오다 성(小田城)을 거점으로 유키 지카토모 등에게 반(反) 막부 결집을 호소했다.

이 시기 《신황정통기[14]와 《직원초》를 집필했다. 고코쿠 원년/랴쿠오 3년(1340년) 고노 모로후유가 간토 통치를 위해 파견되고, 고코쿠 4년/고에이 2년(1343년) 유키 지카토모가 북조에 투항, 세키 성(関城) 등이 함락되자 1344년 요시노로 돌아와 고무라카미 천황을 보좌하며 남조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쇼헤이(正平) 3년/조와 4년(1348년) 시조나와테 전투 패배 후 남조는 아노 행궁(賀名生行宮)으로 옮겨갔다.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으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항복하여 쇼헤이 일통(正平一統)이 성립되었으나, 곧 다카우지 측의 반격으로 다시 아노로 퇴각했다. 쇼헤이 9년/분나(文和) 3년(1354년) 지카후사는 아노에서 62세로 사망했다.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묘(北畠親房墓)
일본 나라 현(奈良県) 고조 시(五條市) 니시요시노 정(西吉野町) 아노(賀名生) 소재


무로지에 소재한 「전(伝)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묘」(伝北畠親房墓).

2. 1. 가문 배경 및 초기 관직 생활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의 명문가인 기타바타케 가(北畠家) 출신이다. 아버지 기타바타케 모로시게(北畠師重)는 고우다 천황(後宇多天皇)의 측근이었으나, 지카후사는 할아버지 모로치카(北畠師親)의 양자로 입적되어 정치적으로 더 유리한 위치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12]

어린 나이부터 관직에 오른 지카후사는 쇼오(正応) 6년(1293년) 생후 6개월 만에 종5위 하에 서위되었다. 이후 좌소변, 참의,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 검비위사별당(検非違使別当), 곤노주나곤(権中納言) 등을 역임했다.

고다이고 천황 즉위 후에는 요시다 사다후사(吉田定房), 마데노코지 노부후사(万里小路宣房)와 함께 '고산보'(後三房)로 불리며 천황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13] 겐오(元応) 2년(1320년) 준나인 별당(淳和院別当)을 거쳐 겐코(元亨) 3년(1323년) 곤노다이나곤(権大納言)으로 승진하고, 쇼추(正中) 2년(1325년)에는 겐지노초자(源氏長者)가 되었다.

겐토쿠(元徳) 2년(1330년), 아들 요요시 친왕(世良親王)이 사망하자 출가하여 정계에서 은퇴했다.

다음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초기 관직 이력을 정리한 표이다.

시기관직
쇼오 6년(1293년) 6월 24일종5위
에이닌 2년(1294년) 1월 6일종5위 상
에이닌 5년(1297년) 2월 18일정5위
에이닌 6년(1298년) 5월 23일종4위
쇼안 2년(1300년) 1월 5일종4위 상
쇼안 2년(1300년) 윤7월 14일병부권대보
겐겐 2년(1303년) 1월 20일좌근위소장
겐겐 2년(1303년) 12월 17일정4위 하, 우근위중장
가겐 3년(1305년) 11월 18일권좌소변
토쿠지 원년(1306년) 12월 22일좌소변
토쿠지 2년(1307년) 11월 1일탄정대필
에이쿄 원년(1308년) 11월 8일종3위
에이쿄 3년(1310년) 3월 9일정3위
에이쿄 3년(1310년) 12월 17일참의
에이쿄 4년(1311년) 1월 17일좌근위중장 겸임
오초 원년(1311년) 7월 20일좌병위독 겸임, 검비위사별당
오초 원년(1311년) 12월 21일권중납언
오초 2년(1312년) 3월 15일검비위사별당·좌병위독 해임
쇼와 원년(1312년) 8월 10일종2위
쇼와 4년(1315년) 4월 17일권중납언 사임
쇼와 5년(1316년) 1월 5일정2위
분포 2년(1318년) 12월 10일권중납언 환임
겐오 원년(1319년) 8월 5일중납언
겐오 2년(1320년) 10월 21일준화원별당
겐코 2년(1322년) 4월 5일우위문독 겸임, 검비위사별당 환임
겐코 3년(1323년) 1월 13일권대납언
겐코 3년(1323년) 5월장학원별당
겐코 3년(1323년) 6월 15일무쓰데와 안찰사 겸임
겐코 4년(1324년) 4월 27일대납언
쇼추 2년(1325년) 1월 7일내교방별당
쇼추 3년(1326년) 2월 9일무쓰데와 안찰사 사임


2. 2. 겐무 신정과 남북조 분열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고다이고 천황의 친정인 겐무 신정이 시작되자, 지카후사는 정계에 복귀했다. 그러나 모리요시 친왕(모리나가 친왕) 파벌에 속했기 때문에 고다이고 천황과 대립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중앙 정치에서 멀리 떨어진 무쓰(오슈)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받은 장남 아키이에를 따라 노리요시 친왕을 받들고 다가 성으로 가게 되었다.[12] 이때 무쓰 장군부 설치를 주도한 것은 모리요시 친왕이었다.[12]

모리요시 친왕은 도호쿠 지방에 영지를 많이 가진 무사들이 아시카가씨에 의해 휘하로 조직되는 상황을 우려하여, 도호쿠 지방을 아시카가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여 아시카가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12]

겐무(建武) 2년(1335년), 호조 씨 잔당이 일으킨 나카센다이의 난을 진압하러 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마쿠라에 그대로 눌러앉아 겐무 정권에서 이탈했다. 그 후 군사를 이끌고 교토를 점령하자, 1336년(겐무 3년) 1월 지카후사는 다카우지를 치기 위해 무쓰에서 교토로 돌아왔다.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과 힘을 합쳐 다카우지를 교토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6]

그러나 규슈로 달아났던 다카우지는 빠르게 세력을 정비하고 대군을 이끌고 다시 교토로 쳐들어왔다.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요시사다와 마사시게의 군대를 격파하고 다시 교토를 점령했다. 히에이 산으로 피신했던 고다이고 천황은 퇴위를 강요당했지만, 교토를 탈출하여 요시노에 행궁을 설치하고 남조를 세웠다. 지카후사는 남조에 합류하여, 다카우지가 옹립한 고묘 천황북조에 대항했다.[6]

2. 3. 히타치 국에서의 활동과 남조 지도

엔겐 3년/랴쿠오 원년(1338년) 5월, 아들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사카이우라(堺浦) 전투에서 전사하고, 같은 해 윤7월에는 닛타 요시사다에치젠국 도묘지나가테(灯明寺畷)에서 전사하자, 지카후사는 남조 측의 총사령관이 되었다.[3] 지카후사는 이세국에서 와타라이 이에유키의 협력을 얻어 남조 세력 확대를 도모했다. 이때 지카후사는 이에유키의 신국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8]

이후 지카후사는 간토 지방에서 남조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유키 무네히로와 함께 노리요시 친왕 · 무네요시 친왕을 받들고 이세 국 오미나토(大湊, 미에현 이세시)에서 뱃길로 도고쿠(東国)로 건너 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폭풍으로 인해 두 친왕과는 헤어졌고, 같이 배에 타고 있던 다테 유키토모 · 나카무라 쓰네나가 등과 함께 히타치국에 상륙했다. 처음에는 진구지 성(神宮寺城, 현재의 이바라키현 이나시키시)의 오다 하루히사를 의지하였으나, 사타케 씨에게 공격당해 함락되자 아와자키 성(阿波崎城)을 거쳐 오다 씨의 본거지인 오다 성(小田城, 현재의 이바라키 현 쓰쿠바시)으로 옮겼다.[3]

오다 성에서 지카후사는 무쓰국 시라카와의 유키 지카토모를 비롯한 도고쿠 각지의 무사들에게 반(反) 막부 세력으로 결집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우쓰노미야 긴쓰나 · 하가 다카사다가 북조 측에 가담하자, 다테 유키토모 · 나카무라 쓰네나가를 보내 하가 다카사다 · 다카토모(高朝) 부자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 시기에 지카후사는 역사서 《신황정통기[14]와 관직 해설서인 《직원초》(職原鈔)를 집필했다고 전해진다. 《신황정통기》는 엔겐 4년(1339년) 가을에 완성되었는데, 그 직전인 8월에 고다이고 천황이 붕어하고, 노리요시 친왕이 12세의 나이로 고다이고 천황의 양위를 받아 고무라카미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지카후사는 유키 지카토모에게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 원군을 요청했지만, 지카토모를 비롯한 도고쿠 무사들은 영지와 관위 승진만을 요구하며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 지카후사가 《직원초》를 저술한 주된 목적도 관위 승진을 요구하는 무사들에게 관직 수여의 원칙과 질서를 깨우치게 하려는 데 있었다고 한다.

고코쿠 원년/랴쿠오 3년(1340년), 북조 측이 고노 모로후유를 간토 통치를 위해 파견하고 오다 씨와 사이가 멀어진 지카후사는 이듬해 11월 북조 군의 압박으로 세키 무네스케의 세키 성(関城, 이바라키현 지쿠세이시)으로 들어갔다. 다테 유키토모나 나카무라 쓰네나가를 비롯하여 유키토모, 쓰네나가와 동족인 이사 성(伊佐城, 지쿠세이시)의 이사 씨(伊佐氏), 다이호 성(大宝城, 이바라키현 시모쓰마시)의 시모쓰마 씨 등 히타치 서부의 남조 세력과 함께 2년간 농성하며 저항하였다. 그러나 남조의 관백 좌대신 고노에 쓰네타다가 후지와라 씨 장자(藤氏長者)의 입장에서 독자적인 도고쿠의 후지와라 씨 계통 무사단을 통솔하는 체제를 구축하고자 한 것도 있어서, 지카후사의 구상은 적과 내부의 내홍으로 그 자신의 입지마저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고코쿠 4년/고에이 2년(1343년) 8월 유키 지카토모가 북조에 투항하고 11월에 세키 성, 다이호 성이 차례로 함락되자, 지카후사는 물러나 1344년 1월 요시노로 돌아왔다.[3] 이후 지카후사는 이미 사망한 고다이고 천황을 대신하여 아직 어렸던 고무라카미 천황을 곁에서 보좌하며 남조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2. 4. 만년

쇼헤이 3년/조와 4년(1348년), 시조나와테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쓰라 등이 이끄는 남조(南朝) 군이 고노 모로나오에게 패배하면서, 남조는 요시노에서 더 깊은 산속인 아노 행궁(賀名生行宮)으로 옮겨갔다.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으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남조에 항복하여 쇼헤이 일통(正平一統)이 성립되었으나, 이듬해 다카우지 측의 반격으로 남조는 다시 아노로 퇴각해야 했다.

쇼헤이 9년/분나(文和) 3년(1354년) 4월,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아노에서 6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지카후사 사후 남조는 뚜렷한 지도자 없이 쇠퇴의 길을 걸었고, 1392년 북조에 의해 통일되었다.[15] 지카후사는 아베노 신사(阿部野神社, 오사카시 아베노구)와 료젠 신사(霊山神社, 후쿠시마현 다테시)에 아들 아키이에와 함께 모셔져 있다. 그의 무덤은 아노에 있으며, 무로지(室生寺, 나라현 우다시)에도 지카후사의 것으로 전해지는 무덤이 남아있다.[15]

3. 정치 활동 및 사상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통치 가문이자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씨와 북조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이는 그들이 궁정에서 서투르고 무례한 귀족이 아닌 무사였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기타바타케 자신의 무라카미 분가보다 유명한 미나모토 씨의 덜 유명한 지파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초대 아시카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싫어했는데, 다카우지는 원래 고다이고 천황의 왕위 계승을 지지했지만 결국 북조를 이끌고 천황의 남조를 지지하는 모든 사람을 파멸시키려 했다.[3]

닛타 요시사다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는데, 닛타를 쇼군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무사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천황이 그를 필요로 할 때마다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기타바타케는 닛타가 북쪽에서 자신의 전투를 벌이는 대신 나라 남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활동했다면 자신의 아들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3]

1339년 고다이고 천황이 사망했을 때, 기타바타케는 히타치 국에서 포위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요 저서들을 12세의 고무라카미 천황에게 보내 조언했다.[3] 그는 저술과 황실 고문 역할뿐만 아니라, 유능한 전투 지휘관으로도 활약하여 쇼군 세력에 맞섰다. 히타치 공성전은 4년 동안 지속되었고, 결국 그의 요새는 함락되었지만, 기타바타케는 요시노로 탈출하여 1354년 사망할 때까지 천황에게 조언했다.[3]

그는 지방 수호지토를 토지에 굶주린 자들이라고 비난하며, 1190년에 이러한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 전통적인 국가의 상태를 변화시키고 통치 기술을 잃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3] 그는 다이호 시대의 정부 구조로 복귀를 추구하며, ''무사''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토지 보유 및 세금 징수 시스템을 폐지하려 했다. 기타바타케는 ''무사'', 나아가서는 ''바쿠후'' (막부), 즉 군사 정부를 천황의 적으로 간주했다.[3]

1339년에 그는 진노 쇼토키를 저술했는데, 이는 일본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은 어린 고무라카미 천황을 위한 지침이자 남조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논문으로 쓰였으며, 1343년에 재구성되고 편집되었다.[3] 그는 혼란스럽고 불균형한 토지 분배를 비판하고, 토지를 차지했던 정부 관료와 봉건 영주를 비난했다. 그는 보상을 추구하는 것은 올바른 행동의 일부가 아니며, 토지와 심지어 목숨까지 의무를 위해 포기하는 것이 무사의 자리라고 썼다. 그는 또한 봉건주의의 혼란은 궁극적으로 제한된 양의 토지를 요구하는 무제한적인 수의 사람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3]

같은 해에 쓰여진 ''직원초''는 정부 관청 및 구조의 기원과 조직, 그리고 관료의 승진 및 임명에 대한 그의 견해를 설명했다.[3]

그의 정치 경력은 다음과 같다.

날짜내용
쇼오 6년(1293년) 6월 24일종5위 하 서위
에이닌 2년(1294년) 1월 6일종5위 상 승서
에이닌 5년(1297년) 2월 18일정5위 하 승서
에이닌 6년(1298년) 5월 23일종4위 하 승서
쇼안 2년(1300년) 1월 5일종4위 상 승서, 윤7월 14일 원복, 병부권대보 임관
겐겐 2년(1303년) 1월 20일좌근위소장 천임, 12월 17일 정4위 하 승서, 좌근위소장은 이전과 같음, 12월 30일 우근위중장 전임
가겐 3년(1305년) 11월 18일권좌소변 천임
토쿠지 원년(1306년) 12월 22일좌소변 천임
토쿠지 2년(1307년) 11월 1일좌소변 사임, 탄정대필 전임
에이쿄 원년(1308년) 11월 8일종3위 승서, 탄정대필은 이전과 같음
에이쿄 3년(1310년) 3월 9일정3위 승서, 탄정대필은 이전과 같음, 12월 17일 참의 보임, 탄정대필은 이전과 같음
에이쿄 4년(1311년) 1월 17일좌근위중장 겸임, 3월 30일 탄정대필 사임, 비젠권수 겸임, 오초 원년 7월 20일 좌병위독 겸임, 검비위사별당 보임, 12월 21일 권중납언 승진, 검비위사별당과 좌병위독은 이전과 같음
오초 2년(1312년) 3월 15일검비위사별당·좌병위독 사임, 쇼와 원년 8월 10일 종2위 승서, 권중납언은 이전과 같음
쇼와 4년(1315년) 4월 17일권중납언 사임
쇼와 5년(1316년) 1월 5일정2위 승서
분포 2년(1318년) 12월 10일권중납언 환임
겐오 원년(1319년) 8월 5일중납언 전임
겐오 2년(1320년) 10월 21일준화원별당 보임
겐코 2년(1322년) 4월 5일우위문독 겸임, 검비위사별당 환임
겐코 3년(1323년) 1월 13일권대납언 승진, 5월 장학원별당 보임, 6월 15일 무쓰데와 안찰사 겸임
겐코 4년(1324년) 4월 27일대납언 전임
쇼추 2년(1325년) 1월 7일내교방별당 보임
쇼추 3년(1326년) 2월 9일무쓰데와 안찰사 사임, 아들 아키이에를 좌근위중장에 임명
겐토쿠 2년(1330년) 9월 17일출가, 법명 소겐, 뒤에 각공
고코쿠 7년/조와 2년(1346년) 11월 13일까지준대신 선하
쇼헤이 6년(1351년) 11월준후
메이지 41년(1908년) 9월 9일정1위


3. 1. 정치 활동

고다이고 천황이 즉위하자 요시다 사다후사, 마데노코지 노부후사와 함께 "고산보"로 칭송받을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7] 겐토쿠 2년(1330년), 세라 친왕의 급사를 슬퍼하여 38세에 출가하여 정계에서 은퇴했다. 법명은 소겐이다. 겐코의 난 등 고다이고 천황의 가마쿠라 막부 타도 계획에는 가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고다이고 천황에 의한 겐무 신정이 시작되자 지카후사는 정계에 복귀했다. 그러나 지카후사는 고다이고와 대립하던 모리나가 친왕 측 인물이었기 때문에 오슈 주둔을 명받은 장남 아키이에를 따라 의량 친왕(후의 고무라카미 천황)을 받들어 무쓰국다가성으로 가게 되었다. 무쓰 장군부 설치를 주도한 것은 모리나가 친왕이었다. 모리나가 친왕은 도호쿠에 소유지를 많이 가지고 있던 동국 무사단이 아시카가 씨에게 조직되어가는 상황을 우려하여, 도호쿠를 동국에서 분리함으로써 아시카가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6]

겐무 2년(1335년) 호조 씨 잔당에 의한 나카센다이의 난이 일어나, 토벌을 위해 가마쿠라로 향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그대로 겐무 정권에서 이반, 이후 교토를 점령하자, 1336년(겐무 3년) 1월 지카후사는 다카우지를 토벌하기 위해 교토로 돌아가,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함께 한때 다카우지를 몰아낸다. 그러나 규슈로 달아난 다카우지는 급속히 체제를 정비하고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진군, 이를 맞이한 요시사다, 마사시게의 군세를 같은 해 5월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격파하고 교토를 재점령했다. 히에이 산으로 도망친 고다이고 천황은 다시 퇴위를 강요받는다. 그러나 고다이고 천황이 교토를 탈출하여 요시노에 행궁을 열자 지카후사는 그대로 남조 측에 합류, 다카우지에 의해 옹립된 고묘 천황북조 측에 대항한다.

기타바타케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통치 가문이자 쇼군 자리에 있던 아시카가 씨와 북조를 유지한 아시카가 씨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특히 그는 초대 아시카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싫어했다.[3]

1339년 고다이고 천황이 사망했을 때, 기타바타케는 히타치 국의 자신의 요새에 포위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요 저서들을 12세의 새로운 천황인 고무라카미 천황에게 보내 그와 그의 조언자들에게 조언했다.[3] 기타바타케는 저술과 황실 고문으로서의 역할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는 또한 유능한 전투 지휘관이었으며, 여러 차례 쇼군 세력의 우세한 군대를 격퇴했다. 히타치 공성전은 4년 동안 지속되었고, 결국 그의 요새는 쇼군 지지자들에게 함락되었지만, 기타바타케는 남조의 수도인 요시노로 탈출하여 1354년 사망할 때까지 천황에게 조언했다.[3]

3. 2. 사상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당시 쇼군 가문이었던 아시카가 씨와 북조 천황에 대한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3] 그는 특히 초대 아시카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비판했는데,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의 왕위 계승을 지지하다가 결국 북조를 세워 남조 지지자들을 핍박했기 때문이다.[3]

1339년 고다이고 천황이 사망한 후, 지카후사는 어린 고무라카미 천황에게 자신의 주요 저서들을 보내 조언했다.[3] 그는 저술과 황실 고문 역할뿐만 아니라, 유능한 군사 지휘관으로도 활약하여 쇼군 세력에 맞섰다.[3]

지카후사는 토지 소유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지방 수호지토를 비판하며, 이들의 토지 소유욕이 국가의 전통을 훼손한다고 주장했다.[3] 그는 다이호 시대의 정부 구조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며, ''무사''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토지 보유 및 세금 징수 시스템을 폐지하려 했다.[3]

1339년에 저술된 『신황정통기』는 일본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기록한 책으로, 남조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3] 이 책에서 지카후사는 혼란스러운 토지 분배를 비판하고, 정부 관료와 봉건 영주들의 토지 겸병을 비난했다. 그는 무사의 의무를 강조하며, 봉건주의의 혼란이 토지 부족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3]

같은 해에 쓰여진 『직원초』는 정부 관청 및 구조의 기원과 조직, 관료 승진 및 임명에 대한 지카후사의 견해를 담고 있다.[3]

연원 3년/력응 원년(1338년), 지카후사는 이세국에서 와타라이 이에유키의 협력을 얻어 남조 세력 확대를 도모했다. 이 과정에서 지카후사는 이에유키의 신국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8]

고코쿠 원년/랴쿠오 3년(1340년), 지카후사는 히타치국에서 남조 세력과 함께 북조에 대항했다. 그러나 고코쿠 4년/코에이 2년(1343년)에 세키성과 오다성이 함락되자 요시노로 귀환하여, 고무라카미 천황을 옹립하고 남조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4. 저술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남조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일본 역사를 천황 중심으로 서술한 역사서인 신황정통기를 저술하였다.[3] 이 책은 어린 고무라카미 천황을 위한 지침이자 남조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논문으로 쓰였으며, 주로 길 위에서 쓰여 1343년에 재구성 및 편집되었다.[3]

신황정통기에서 지카후사는 혼란스럽고 불균형한 토지 분배를 비판하며, 정부 관료와 봉건 영주를 비난했다. 그는 보상을 추구하는 것은 올바른 행동이 아니며, 의무를 위해 토지와 목숨을 포기하는 것이 무사의 자리라고 주장했다.[3]

또한 지카후사는 1339년에 직원초를 저술했다.[3] 이 책은 정부 관청 및 구조의 기원과 조직, 관료의 승진 및 임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설명한 책이다.[3]

신황정통기[8]와 직원초는 그가 간토 지방에서 남조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활동하던 시기에 집필했다고 전해진다.

5. 평가 및 영향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남조의 핵심 지도자로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남조를 지탱하고 북조에 맞서 싸운 인물로 평가받는다.[3] 그의 저술, 특히 『신황정통기』는 일본 역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며, 천황 중심의 역사관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8]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함께 당대 최고의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3] 그의 저작들은 일본 봉건 정부와 황실 계보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한편, 『진노 쇼토키』에서 정부의 혼란스러운 토지 분배를 비판했지만, 토지를 차지한 정부 관료와 봉건 영주 또한 비난했다. 그는 지방 수호지토를 토지에 굶주린 자들이라 비난하며, 1190년에 만들어진 이 시스템이 전통적인 국가의 상태를 변화시키고 통치 기술을 잃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3]

5. 1. 긍정적 평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남조의 핵심 지도자로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남조를 지탱하고 북조에 맞서 싸운 인물로 평가받는다.[3] 그는 유능한 전투 지휘관으로, 여러 차례 쇼군 세력의 우세한 군대를 격퇴했다.[3] 비록 히타치 공성전에서 그의 요새는 함락되었지만, 그는 남조의 수도인 요시노로 탈출하여 고무라카미 천황에게 조언하며 남조를 위해 헌신했다.[3]

그의 저술, 특히 『신황정통기』는 일본 역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며, 천황 중심의 역사관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8] 이 책은 어린 고무라카미 천황을 위한 지침이자 남조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논문으로 쓰였다.[3] 또한, 『직원초』는 정부 관청 및 구조의 기원과 조직, 관료의 승진 및 임명에 대한 그의 의견을 담고 있다.[3]

그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함께 당대 최고의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3] 그의 저작들은 일본 봉건 정부와 황실 계보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비록 그의 저작들이 개인적인 편견과 정치적 동기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학문적 업적은 그를 당대 최고의 인물 중 하나로 꼽히게 한다.

5. 2. 부정적 평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진노 쇼토키에서 정부의 혼란스러운 토지 분배를 비판했지만, 토지를 차지한 정부 관료와 봉건 영주 또한 비난했다. 그는 보상을 추구하는 것은 올바른 행동이 아니며, 의무를 위해 토지와 목숨을 포기하는 것이 무사의 도리라고 주장했다.[3] 그는 봉건제의 혼란이 결국 한정된 토지를 원하는 무한한 사람들로부터 비롯된다고 보았다.[3] 지카후사는 지방 수호지토를 토지에 굶주린 자들이라 비난하며, 1190년에 만들어진 이 시스템이 전통적인 국가의 상태를 변화시키고 통치 기술을 잃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3]

6.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와 관련된 장소

나라현 고조시 니시요시노초 가노]]

참조

[1] 서적 Kitabatake Chikafusa
[2] 서적 Dictionnaire historique du Japon https://books.google[...]
[3]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https://archive.org/[...] Stanford University Press
[4] 서적 Sovereign and Subject
[5] Kotobank 北畠親房
[6] 서적 北畠親房:大日本は神国なり ミネルヴァ書房
[7] 서적 天皇の思想: 闘う貴族北畠親房の思惑 山川出版社
[8] 서적 神皇正統記 岩波文庫
[9] 웹사이트 国指定文化財 https://www.city.uda[...] 宇陀市 2016-09-01
[10] 논문 准大臣制の成立と貴族社会 -鎌倉後期の家格再編と南北朝・室町期への展開- 校倉書房
[11] Kotobank 北畠親房
[12] 서적 北畠親房:大日本は神国なり ミネルヴァ書房
[13] 서적 天皇の思想: 闘う貴族北畠親房の思惑 山川出版社
[14] 서적 神皇正統記 이와나미 문고(岩波文庫)
[15] 웹인용 国指定文化財 https://www.city.uda[...] 宇陀市 2021-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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